[조용호의 문학공간] "조선 남자들은 사랑할 능력도 없는 미성년자"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6-05 14: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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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문화' 여름호 'B사감과 러브레터' 이어쓰기
구효서 전경린 한창훈 백가흠 윤미현 김세희
추문 만들어지는 구조와 B사감의 애틋한 사랑
"불완전한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연민"

"인제 고만 놓아요. 키스가 너무 길지 않아요. 행여 남이 보면 어떡해요."

"길수록 더욱 좋지 않아요.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키스를 하여도 길다고는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짧은 것을 한하겠습니다."

 

B사감이 홀로 자신의 방에서 남녀 목소리를 바꾸어가며 벌이는 일인극이다. 기숙사 여학생들에게 오는 러브레터를 검열해 '붉으락푸르락, 편지 든 손이 발발 떨리도록 성을 내면서' 매섭게 추궁하고, 남자라곤 오빠나 아버지까지 면회를 통제하여 학생들이 동맹휴학까지 할 정도로 원성이 자자한 그 B사감이 정작 심야에 자신의 방에서 러브레터를 얼굴에 문지르며 저리 혼자 애가 타는 모습이라니, 이를 몰래 지켜본 여학생 중 하나는 안쓰러워 눈물까지 흘리는 지경이다.

 

소설은 세 여학생들이 연극 같은 장면을 훔쳐보는 장면에서 끝나는데, 그 뒤 B사감은 어찌 됐을까. 소문이 나서 쫓겨났을까, 아니면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여학생들을 징계했을까. 애당초 그녀는 왜 저런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게 됐을까. 대산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계간 '대산문화'에서 매년 여름호 특집으로 진행해온 올해 '이어쓰기' 작품은 현진건(1900~1943)의 'B사감과 러브레터'(1925년 '조선문단' 2월호)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떤 시각으로 그녀를 다시 평가할 수 있을까.

 

▲'B사감과 러브레터' 이어쓰기에 참여한 소설가 한창훈, 김세희, 전경린(왼쪽부터). [대산문화 제공]


이번 이어쓰기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예외 없이 B사감을 옹호하는 쪽에 서거니와, 그 방식은 대강 두 부류로 나뉜다. B사감에게 남모르는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전제로 애틋한 사랑을 추론하거나 인간적 연민의 대상으로 여기는 그룹(전경린 한창훈 김세희)이 있고, 다른 한편(구효서 백가흠 윤미현)에서는 현대사회에서 추문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드러내며 그 구조를 비판하거나 그녀의 주장 자체를 옹호하는 방식을 택한다.

 

전경린(58)은 'B사감과 자매들'에서 당대 여성들이 처한 어려움을 드러내며 B사감의 순수한 사랑을 옹호한다. B사감의 언니 '희덕'은 남편이 일본 유학하던 5년 동안 방앗간집 시댁에서 온갖 일을 다 하며 봉사했건만 남편은 귀국한 뒤 첩을 들여 대처에서 돌아올 줄 모른다. 막내 '희순'은 자유연애 사상 신봉자이지만 남자의 배신에 실망하며 조선 남자들은 "사랑할 능력도 없는 미성년자고 제 몸이 제 것도 아닌 담보물들"이라고 깎아내린다.

 

둘째인 B사감은 작은오빠와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간 '준휘'를 일찍부터 사모했다. 준휘가 상해 임시정부 산하 공격대에 들어가자 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해 드물게 회신을 받기도 했다. 자매들이 기숙사를 찾아와 준휘의 유골과 그가 모아둔 편지를 전하자 B사감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B사감은 그 순간이 두 달 전부터 반복해서 꾼 악몽 속의 장면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악몽에서 깨면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지난 편지를 꺼내 읽었고, 다음 날엔 잠들기가 무서워 여학생들에게 온 편지들까지 샅샅이 읽으며 기나긴 밤들을 이겨냈다.'

 

한창훈(57)은 'B사감과 운명의 화살'에서 슬기로운 방식으로 B사감 구하기에 나선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처럼 이제 소문은 학교 담을 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인근 여학교로 퍼졌고, 곁가지 따라 남학교로도 흘러갔으며 기숙사에 자녀를 맡긴 학부형의 입과 입으로까지 전달되었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B사감은 '풍기 문란 교원 진상조사단'에 불려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진상조사단 회의에서 막판에 젊은 교원이 나서서 B사감 흉내를 내는 학생들이 어떤 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았는지 역설한다. '키케로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연극은 인생의 모사요, 관습의 거울이요, 진리의 반영이라고. 그렇게 멋진 연극의 무대를 우리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배우지도 않고 해낸 것이죠. …사감 선생님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과도한 노력이 필요한 그 연기와 무대의 연습을 집중적이고 효과적으로 가르쳐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B사감은 기숙사 사감을 사임하고 연극부 교원으로 발령이 난다.

▲'B사감과 러브레터' 이어쓰기 특집에 수록된 삽화. [대산문화 제공]

 

참여 필자 중 막내 격인 김세희(33)는 '눈물'에서 인간에 대한 순수한 연민을 드러낸다. 쉰여덟이 된 김영혜는 교회 부목사가 어디를 둘러보아도 음탕함이 가득하다고 성을 내는 설교를 듣다가 오랜만에 학창시절 B여사를 떠올린다. B여사의 한밤 해프닝을 보고 소문을 냈던 여학생 중 한 명이었던 그녀는 당시 충격을 받고 불 꺼진 방으로 돌아와 후닥닥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목까지 당겼을 때 영혜의 얼굴에는 어찌된 일인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영혜는 졸업하고 곧바로 결혼한 뒤 곡절 많은 시기를 통과해왔다. '굶주림과 억울한 죽음이 많은 시기였고, 눈물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다. 영혜 자신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서히,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게 되었다.' 남편과 외아들은 전쟁 때 죽었다. 살면서 영혜는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40년 전 그날 밤 흘렸던 것과 같은 눈물은 다시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날 그 눈물은 '한 인간의 가장 비밀스럽고 어두운 면'을 목격한 연민 때문이었다. 개인사의 곡절 때문에 울 수는 있어도 불완전한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연민 때문에 운다는 건 쉽지 않다. 그날 밤 B사감은 어린 여학생의 눈물 속에서 이미 옹호받은 셈이다.

 

백가흠(46)은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2'에서 추문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에 포커스를 맞춘다. B가 여학생동 사감으로 있는 대학입시기숙학교에 소설 속 B사감 같은 존재가 있다는 소문이 댓글을 통해 퍼져나간다. 소설이 실제 있었던 일을 다룬 기사처럼 인식되면서 "소설의 내용이 다분히 여성의 성적 외모를 비하하고 있다"는 주장과 "한 여성의 이상한 성격과 취미가 외모 콤플렉스와 남성의 사랑에 대한 굶주림에 의한 것이며 그리하여 같은 여성을 억압, 공격한다"는 비판에 힘입어 관심이 증폭된다.

 

"사람들은 소문의 진실 같은 것은 관심 없었으므로 이제 문제는 오로지 당사자인 B사감의 것이 되었다. B는 억울했고, 소설 내용처럼 이제 목격자를 찾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그 말은 B도 소설의 내용 중 일부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음에도 그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B는 소문의 당사자였으므로 소문에 적극적이었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이야기를 재미 삼는 데 몰두했다." 결국 또 한 명의 여성이 근거 없는 소문으로 인해 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B사감에 대한 소문은 돌고 돌아 심심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스토리는 더 공고해지고 단단해졌다'는 시각이다.

 

이번 특집의 맏형 격인 구효서(63)는 '사랑의 진실'에서 날렵하게 'n번방 사건'을 가져와 남자들의 야만을 도마에 올린다. 연극 'B사감과 러브레터'를 100회째 연기한 배우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세 여성의 만남이 배경이다. 최고 인기를 누리는 배우는 연기도 잘할 뿐더러 '태훈'이라는 잘 나가는 남자 친구도 있다. 이 남친은 100회 공연 축하 자리에 오지 못한 대신 B사감의 대사를 전화로 떠든다. 현진건 소설 속 러브레터에 등장하는 이름도 '태훈'이거니와 대사 또한 이 편지의 한 대목에서 가져왔다. "나의 천사, 나의 하늘, 나의 여왕,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나의 애를 말려 죽이실 테요? 나의 가슴을 뜯어 죽이실 테요? 내 생명을 맡으신 당신의 입술로…"

 

'려'는 배우 친구의 남친보다도 그녀의 타고난 연기력이 더 부럽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 '끝끝'이라는 사람에게 '연기 지도'를 받는데 철저하게 문자로만 이루어지는 중이다. 텔레그램의 알바 모집 게시글에 속아 몇 개의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이 악몽의 시작일 줄 몰랐다. 세 여자들의 수다가 끝나갈 무렵 화장실에 다녀오던 한 여자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공개된 '끝끝방' 주범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얼음이 된다.

 

▲'B사감과 러브레터' 이어쓰기에 참여한 소설가 구효서, 윤미현, 백가흠(왼쪽부터). [대산문화 제공]


극작가 윤미현(40)은 '신여성'에서 B사감의 생각은 작금 여성들에게도 유효하다고 웅변한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던 할머니는 '시골 달랑무 같은 촌스러운 영감탱이' 남편이 아이들 졸업식에 오는 걸 기겁하며 막았다. '너희 할아버지는 평생을 할머니한테 맞고 사셨어.' 그 할머니의 딸인 엄마는 직장을 그만둔 아버지에게 "어디 원양어선 탈 자리 있나 알아보기나 하라"고 구박한다.

 

딸의 행태를 보다 못한 할머니는, 중2짜리 손녀 양육을 핑계 대며 자신은 일자리 찾을 궁리를 안 하는 엄마에게 "나는 C여학교 다닐 때 B사감에게 그렇게 안 배웠다"면서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 너도 일을 하라"고 다그친다. 엄마 왈, "그 B사감도 남자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외쳤어도, 그게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저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어요." 할머니의 응수. "그건 잘못된 이야기다. 그 옛날 기숙사에 있었던 여학생들이 지어낸 얘기였어. 내가 C여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B사감은 지팡이를 들 만큼 늙었는데도 늘 남자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어. 나는 그 선생을 존경한다. 너도 남자에게 의지하지 말고, 일을 하면 얼마나 좋니?"

 

현진건의 B사감은 "사내란 믿지 못할 것, 우리 여성을 잡아먹으려는 마귀인 것, 연애가 자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도 모두 악마가 지어낸 소리"라고 학생들에게 열을 내어 설법했던 여성이다. 한 세기가 흘렀어도 'n번방'에서 보듯 B사감의 주장을 여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는 세태를 어찌할까.

 

이 기획은 대산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대산문화'에서 2015년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소나기' 이어쓰기가 독자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매년 여름호에 지속돼왔다. 잘 알려진 명작들에 다시 관심을 갖도록 환기하면서 열린 결말의 그 후 이야기들을 통해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획이다. 지금까지 '소나기'를 비롯해 '봄봄'(김유정), '사랑손님과 어머니'(주요섭), '날개'(이상), '운수 좋은 날'(현진건)이 다양한 상상력으로 이어졌고 단행본으로도 발간됐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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