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이경자 "인간을 떠난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8-21 1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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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여성주의 작가가 치열하게 들여다본 여성문제
'절반의 실패' '나는 오늘도 이혼을 꿈꾼다' 복간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간 삶 위해 페미니즘도 생겨나
"젊은 여성들, '슬픔과 분노의 역사' 보며 여유 찾기를"

여성 문제를 다룬 한국의 대표적인 중진 소설가 이경자(72)의 원조 페미니즘 소설 2권이 나란히 복간됐다. 절판된 이 책들을 다시 보기 원하는 독자들이 클라우드 펀딩을 통해 출간 자금을 모금한 것도 특징이다. 다양한 측면에서 여성문제에 접근한 단편들을 통해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절반의 실패'(1988년)와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한 미니픽션 모음집 '오늘도 나는 이혼을 꿈꾼다'(1992년)가 그것이다. '걷는 사람들'에서 나온 2020년판 복간본에는 여성들의 '분노와 슬픔'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금 한국 문학은 페미니즘 소설이 장악한 양상이다.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 문학에서 여성문제는 무엇이 달라졌고 또 무엇이 여전할까. '82년생 김지영'이 대형 베스트셀러를 구가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30여년 전에 출간된 '절반의 실패'의 강도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국내 대표적인 작가들의 단체인 '한국작가회의' 이사장(2018.2~2020.2)을 2년 동안 재임한 뒤 올 초 물러났고, 현재는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중진 여성 소설가를 통해 여성문제와 한국문학,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들었다.

▲30여 년 전에 치열하게 집필했던 여성 문제에 관한 소설들을 복간한 소설가 이경자. 그는 "여성주의 연작소설 '절반의 실패'는 나에게 복잡한 영광과 오해를 안겨준 소설"이라며 "이 소설로 조롱과 응원을 한꺼번에 받던 날들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고 개정판 머리말에 썼다. [문재원 기자]


-지금 젊은 독자들이 태어나 성장하는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른 뒤 '절반의 실패'가 다시 출간됐다. 소감이 어떤가.

"'절반의 실패'를 쓸 때 나에겐 응원도 있었지만 엄청난 경멸과 조롱이 쏟아지던 분위기였다. 여자가 밖에 나가 일하는 것도 천하게 여길 정도였으니까, 그동안 강고하게 세련되어진 남존여비, 남성주의 구도에다가 나름대로 조약돌 하나 던지는 것이 가소롭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처럼 보였던 거다. 당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분신을 하며 투쟁하던 학생들처럼 죽어도 좋다는 분노로 쓴 글들이다."

 

-지금보다 훨씬 강고했던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들의 현실에 집중하면서 사회에 충격을 주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결혼 전까지는 내가 잘난 여자라고 생각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소설가 됐지, 남들이 미워하지 않지, 다 괜찮았다. 결혼하고 나니까 저런 인생은 절대 안 살 거라고 했던 엄마와 똑같아졌다. 경상도 어느 지방의 소종가 장남과 결혼해보니 남녀차별이 질서로 다져져 미풍양속이 되어 있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여자' 공부를 시작했다. 여성문제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책을 사서 보다 보니 남녀 차별은 가족법에 다 들어 있었다."

 
이경자는 1988년 11월에 쓴 '절반의 실패' 작가의 말 '가면을 벗고'에서 "가면이 벗겨져 나가자 잘못 보았던 것, 보이지 않던 것이 '여자 사람'의 눈에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면서 "수모와 환멸의 삶을 지치도록 살아오면서 이제 겨우 '여자 사람'이 된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생각했다고 썼다. 그는 "여기에 실린 열두 편의 소설이 바로 이런 시각과 관점에서 시작됐다"면서 "우리 여성들의 각각의 삶의 현장, 그 답답하고 지겨운 실체만 드러내는 데 그친 것을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작가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답답한 조건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충격을 받았고, KBS 미니시리즈로도 제작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확히 한 세대 뒤에 페미니즘 소설이 득세를 하고 있고 한국문학을 장악한 양상이다.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소설을 썼던 입장에서 이즈음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이제 조금 편하게 여성문제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예전처럼 적개심을 드러내거나 경멸하고 조롱하는 살벌한 태도는 많이 수그러들었다. 그냥 객관적으로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분위기인데, 사람들이 이제 좀 편한 거다. 옛날에는 여자가 강제추행을 당하면 자살했는데, 지금은 반대다. 천지개벽이다."

 

-천지개벽이라니…

"그렇지 않은가? 뒤집어진 거다. 개인적으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이 지금도 너무 슬프다. 옛날 희망제작소를 만들 때 100인 위원회에 참여해 회의도 했고, 이 사람 죽기 2주 전에도 만났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깨끗한 정치가였다. 서울시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희망과 야망과 욕망이 있었다. 그는 부끄러움 때문에 자기를 다 버린 거다. 우리 사회는 여기까지 왔다. 성인식이라고 할까."

 

-박 시장 문제를 이대로 묻고 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세력의 목소리가 여전하다.

"어떤 조직도 인간 본연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바탕에 깔려야 하는 게 정답이다. 공동체의식과 공동선에 부합돼야 한다. 두 여인이 아이를 두고 서로 친자임을 주장하며 송사를 제기했을 때 솔로몬이 아이를 반으로 갈라 가지라고 평결하자 친모는 포기했다. 산으로 빨리 걸어가는 박 시장을 보면서 인간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장례식 날 기자회견이 열렸다. 페미니즘도 인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건강하고 아름답고 상스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인간의 삶을 위해 페미니즘도 생긴 거다. 저변에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 이런 것이 흐르지 않으면 모든 걸 다 죽인다."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한 이경자. 그는 "조직 문화를 수평적인 관계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자평했다. [문재원 기자]


-한국작가회의 최초로 여성으로서 이사장 임기를 마쳤다. 어떤 태도로 작가회의를 이끌었는가.

"문학은 모든 것의 권력화에 저항할 임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작가회의 이사장을 하면서 수평적인 문화가 정착된 게 가장 큰 변화였을 것이다. 평화는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것, 이 기반 없이 얻어지지 않는다. 작가회의에서 여러가지 역할을 해오면서 느낀, 다양한 불균형과 권력화에 불만과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 권력을 만들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느끼게 하려고 애썼다."

 

-근년 들어 한국사회를 뒤흔든 일련의 미투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게 다 시대 변화의 징후들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늘 변화는 있어왔는데, 이런 운동도 큰 변화의 어느 지점을 드러내는  현상인 거다. 미투운동은 긍정적인 변화들을 많이 이끌어냈다. 이용하는 사람도 생기겠지만, 그건 인간의 문제이다. 어떤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문학이 페미니즘 서사로 획일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출판사들의 상업성도 한 몫 거든다는 비판도 있는데…

"그 시대의 성격을 반영하는 한 현상으로, 나중에 이 시대를 이해할 때 받아들여질 거다. 그 시대 문학으로는 이렇게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절반의 실패'도 시대적 산물이었다. 1980년대는 노동, 농민, 여성, 모든 분야에서 억눌렸던 것들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그런 시대였다. 나 같은 경우 문학 한다는 결의와 소망, 열망 외에 돈이나 명예 이런 거는 안중에 없었다. 작가가 명예나 돈을 의식하게 되면 망조가 들기 시작하는 거다. 현상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유지하는 거, 이게 작가가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소양이다. 나도 문단에 권력을 가진 자로부터 돌봐준다든가, 키워주겠다든가 하는 유혹도 받았지만 내가 훼손될 것 같아서 단호히 피했다. 명예라는 건 사실 내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거품일 뿐이다. 나라는 사람은 내가 느끼는 나인 거다. 이걸 지켜야 하고 이를 위해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글을 쓰게 하는 에너지다. "

▲이경자는 "향후 최소한 10년 동안은 인생과 잘 화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생각"이라면서 "내가 죽을 때 인생이 고맙다고 느끼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문재원 기자]


-다시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있다. 이 '세기의 역병'을 어떻게 극복할까.

"코로나는 세계적인 현상이고, 질병을 넘어서는 문명의 문제라고 본다. 이런 역병을 몰고 온 인류의 삶을 유지하는 문명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사람의 쓰레기를 소나 돼지가 먹고 또 남은 건 논밭에 퇴비로 썼다. 지금은 인간에 의해 그런 순환이 막혀버렸다. 백신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인류의 어떤 삶이 이 시점에 이런 국면을 맞이하게 됐는지, 질병만 들여다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보자는 말이다."

 

-30년 전에 비해 여성들의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지난 시절에 썼던 여성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는가.

"일단 재미있게 읽기를 바란다. 30년 전에도 이랬구나 생각하면서 조금 숨고르기를 해봤으면 한다. 여성들이 지금 느끼는 분노와 슬픔이 있다면, 그 분노와 슬픔에도 역사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30년 전 과거를 통해 슬픔과 분노를 경험하고, 지금 여기를 보는 거울로 삼으면서 젊은 여성들이 여유를 찾았으면 한다. 각박한 현실에서 조금 벗어나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뭔가 더 생각하고 자극을 받는데 이 책이 기여하기를 바란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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