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베르나르 베르베르 "사후 법정에서 내려다본 유쾌한 삶의 찬가"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8-28 13: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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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사랑받는 프랑스 작가의 소설 같은 희곡
지상의 도덕을 초월한 사후 가치체계로 재단한 삶
피고인이 구애하는, 염라 대신 아름다운 여성 재판관
"인간 삶은 유전자 25%, 카르마 25%, 자유의지 50%"

"피숑 씨, 당신은 배우자를 잘못 택했고, 직업을 잘못 택했고, 삶을 잘못 택했어요! 존재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포기했어요,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했죠."

 

아나톨 피숑. 전직 판사. 오래 피운 담배로 인해 폐암에 걸려 수술을 받던 중 혼수상태 돌입. 수술을 집도하던 외과의사는 막바지 노력을 포기한 채 휴가를 떠남.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심판 법정에 선 아나톨. 검사 베르트랑은 매섭게 그의 '죄'를 들추며 몰아부친다.

▲개미의 세계를 개미의 시각으로 그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새긴 베르나르 베르베르. 이후 여러 작품들로, 특히 한국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그가 이번에는 희곡을 선보였다. [열린책들 제공]


"피숑 씨는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는 상대에게 충실했어요. 더군다나 그 둘은 서로에게 권태를 느끼면서도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그가 부정을 저지르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평생 아나톨의 수호천사를 맡았던 변호인 카롤린이 "검사는 혼외정사를 옹호하고 있다"며 이의를 제기해도 재판장 가브리엘은 "주지하다시피 여기서 우리는 지상의 도덕을 초월하니까 논고를 계속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 가치와 관습이라는 미명하에 피숑 내외는 지극히 기본적인 쾌락을 스스로 차단했습니다. 바람을 피워 부부 관계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하지 않았죠."

 

카롤린이 다시 이의를 제기하지만 가브리엘은 기각하고, 베르트랑은 막장까지 간다.

 

"이것은 도덕의 차원이 아니라 상식의 차원입니다. 우리한테 달린 성기는 쓰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이 과연 생길까요, 저러면……."

한국 독자들에게 유달리 사랑받는, 거의 매년 여름 시즌이면 베스트셀러 한 권씩을 선보이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59). 올 여름은 그가 지금까지 두 권밖에 내놓지 않은 희곡 중 뒤늦게 국내에 번역된 '심판'(전미연 옮김·열린책들)으로 찾아왔다. 사후세계는 고래로 수많은 작품들의 상상공간으로 차용돼왔다. 동양에서는 염라대왕이 엄한 표정으로 공포스러운 기운을 뿜어내고, 서양의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 또한 두려운 대상인 것은 마찬가지다. 베르베르의 사후세계 심판정은 부드럽고 유머러스한 것이 특징이다.

 

재판장 가브리엘과 변호인 카롤린은 여성이고, 검사 베르트랑은 카롤린과 전생에 서로 부부 사이였다. 이 재판정은  '삶의 형'에 처해 다시 환생하게 할 것인가를 가리는 법정이다. 삶의 형을 받으면 다시 태어날 성별, 나라, 직업, 강점과 핸디캡, 배우자, 부모는 물론 죽게 될 상황까지 미리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한 대로만 삶이 진행되는 건 물론 아니다. 재판장 가브리엘은 삶의 형에 처해진 이들에게 충고한다.

 

"우리가 지금 정하고 있는 건 당신의 카르마에 해당하는 25퍼센트라는 사실을 알아 둬요. 당신이 무의식의 소리에 계속 귀 기울일 때 펼쳐지게 될 인생 경로인 거죠.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징표들이 끊임없이 이 삶의 여정을 당신에게 일깨워 줄 거예요."

베르베르의 사후 법정에서 인간의 삶은 유전자 25%, 카르마 25%, 자유의지 50%의 재료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아나톨은 카르마와 유전자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잘못 발현한 것이 문제였다.  윤회와 더불어 '업보(業報)'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카르마'가 핵심인 인도 종교가 배합된 코믹한 법정 풍경이다. 앉은자리에서 영화 한 편 볼 시간 정도면 휘뚜루 읽히는 이 희곡은 죽음을 가지고 논다. 읽다 보면 평소 그토록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죽음에 이렇게 낄낄거리면서 동참하는 것이 맞는지, 돌아보게 된다.

검사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는 건 아니다. 아나톨을 위한 변호를 하는 카롤린의 이야기도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닌다. 카롤린은 어두운 클럽에서 술에 취해 하룻밤 쾌락에 탐닉했던 남녀를, 아나톨의 선택을 옹호한다. 순응주의를 큰 악덕으로 단죄했던 검사 베르트랑이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일구기보다 불행을 줄이려고 애쓴다"고 말하자, 카롤린이 답한다.

"그들은 거시적으로 보지 못해요. 바로 코앞의 것만 보죠. 만약 피숑 씨가 유죄라면, 한 시대와 그 시대의 풍속과 관습 전체에 함께 죄를 물어야 해요. ……검사의 논고에는 피숑 씨가 아내의 임신 후 결혼하게 됐다는 내용이 누락됐어요. 그는 아내에게 낙태를 요구하기보다 용기 있게 자신의 오르가슴을 책임지기로, 그래서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했던 거예요."

▲동양의 사후 세계 철학과 프랑스식 유머를 섞어 흥미로운 희곡을 완성한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는 각별히 자신의 소설을 아끼는 한국 독자들을 배려해 소설 속에 한국인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열린책들 제공]


변호인의 눈물겨운 변론을 받아들여 가브리엘은 과연 아나톨 편을 들어주었을까. 재판장 가브리엘은 피고인이 '자신의 재능을 망각했는지' '위대한 러브스토리를 그르쳤는지'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했는지' '옳은 배우자를 찾았는지' '좋은 판사로 살았는지',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영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각각 판정하여 최종 선고를 내렸다. 아나톨은 어떤 판결을 받았고, 또한 순순히 그 주문을 받아들여 베르베르가 정한 사후 법정의 원칙을 따랐을까. 이어지는 판결과 기발한 반전은 독자들의 몫이다.

영혼 번호 102-683 아나톨 피숑은 고
대 이집트 궁궐의 여인, 카르타고 항구에서 생선 내장을 빼던 사람, 앵글로색슨족 전사, 일본 사무라이를 거쳐 바로 전생에서는 몽마르트르 물랭루주에서 춤을 추던 프렌치 캉캉 댄서였다. 카롤린은 프랑스에서 1922년 태어나 전쟁을 겪고 1957년 피레네산맥 좁은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어이없이 죽었다는 카롤린을 위무하며 가브리엘은 말한다.

 

"1922년에서 1957년까지…….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 죽는 거예요."

 

베르베르의 첫 희곡 '인간'은 통상적인 희곡의 형식을 따르지 않아 소설로도 읽혔지만 작가가 연극을 염두에 두고 2인극 형태로 집필해서 프랑스 무대에 올랐고, 국내에서도 2010년 초연됐다. 두 번째 희곡 '심판'은 2015년 출간돼 프랑스 무대에 올랐고, 올 가을에도 새 연출가가 다시 무대에 올릴 예정이라고 한다. 이 희곡은 지상의 가치체계를 뒤흔들고 코믹한 프랑스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유쾌함을 선사한다. 재판을 진행하다 말고 가브리엘이 남친에게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하고, 변호인과 검사는 전생에 싸우던 부부의 관성을 법정에서도 재연하며, 피고인은 아름다운 재판관 가브리엘에게 반해 침대에 커튼을 드리우고 스킨십까지 시도한다. 이 좌충우돌의 재판정 풍경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곳곳에 매설해놓은 문장들은 만만치 않은 무게를 지닌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상정한 사후세계 법정은 준엄하면서도 부드럽고 유쾌한 공간이다. [열린책들 제공]


2000년 전 로마시대 사자 먹이로 던져져 순교한 이래 천국에서만 살아온 가브리엘은 아나톨에게 말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상상하는 사후세계 재판관의 이 속마음은 아직 살아 있는 모든 독자에게 전하는 삶의 찬가라 할 만하다.

 

"나한테는 육화(肉化)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고동치는 심장, 송송히 맺히는 땀, 입 안에 고이는 침, 자라나는 머리카락…… 맛있는 것을 먹고 사랑을 나눌 때의 기쁨. 뛸 때 두 다리에 팽팽히 힘이 들어가는 느낌, 선들선들하는 바람,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 태양, 젊음, 심지어 노화마저도. 느껴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자동차 핸들의 감촉, 주식 거래의 긴장감, 말 등에 올라 달리는 기분…."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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