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박미하일 "로봇을 아내로 둔 남자가 꾸는 꿈"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10-06 13:50:52
  • -
  • +
  • 인쇄
고려인5세 러시아 소설가 박미하일 장편 '예올리'
러시아 카타예프 문학상 수상작 국내 처음 소개
소련 붕괴 이후 혼돈 배경으로 환상과 현실 교차
"삶을 시처럼 만들어주던 꿈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단순해요. 그렇지 않아요? 삶을 시처럼 만들어주던 꿈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우리 모두에게 꿈이 있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꿈이 사라지고, 손바닥에 남은 것이라고는 슬픈 운명의 우여곡절뿐이네요."

삶을 시처럼 만들어주던 꿈, 그 꿈을 당신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지. 그 꿈에 대한 기억조차 아스라하고 눈앞에 거친 행로만 기다리는 형국이라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오늘 하루도 삶을 시작하는지. 이 경우 꿈이란, 단순히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라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현실적인 동력인 셈이다. 꿈은 희망의 다른 말이기도 한데, 희망은 다분히 현실적인 뉘앙스인 반면에 꿈은 환상이나 공상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그 차이는 미세한 것이어서 때론 현실이 환상처럼, 환상이 현실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러시아 소설가 박미하일(71)은 사람 같은 로봇 여인 '예올리'를 등장시켜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그 꿈을 지켜낸다.

▲고려인5세 소설가 겸 화가 박미하일.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고 자신이 즐겨 그리는 자작나무 그림 앞에 선 그는 "사랑은 내 소설의 영원한 화두"라면서 "최근에는 진짜 사람과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마무리해 러시아로 보냈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올해는 한·러수교 30주년. 1990년 옛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 한·소 수교를 맺었다.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 혼란스러운 당시야말로 러시아에 사는 이들에겐 꿈이 사라진 황막한 시절이었다. 소설가 겸 화가인 박미하일은 외모만 보면 한국인과 다를 바 없지만,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을 거쳐 모스크바에서 살아온 고려인 5세다. 고조부 때 연해주에 정착했는데, 스탈린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켜 그곳에서 미하일의 부모가 만나 그를 낳았다. 미하일은 1990년대부터 한국에서 그림 전시를 해왔고, 러시아에서 펴낸 소설도 7권이나 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최근에는 러시아에서 카타예프 문학상(2007년)을 받았던 '예올리'(전성희 옮김·상상)를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 선보이면서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도 열었다.

 

'예올리'는 인공지능을 갖춘 사람 형상, 20대 여성 모습을 지닌 로봇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람과 로봇 간의 사랑 이야기를 펼친다. 국내에서는 근년 들어 SF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지만,이미 20여 년 전에 지금은 칠순에 접어든 고려인 5세가 과학 기술을 접목시켜 사람의 정체성을 묻는 소설을 옛 소련 붕괴 이후 혼란스러운 러시아를 배경으로 펴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모스크바와 크림반도, 흑해의 항구와 휴양지, 한국의 남해까지 이르는 무대를 배경으로 사람 같은 로봇에 순정한 사랑을 투사했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에는 나쁜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겼어요. 그동안 사회주의 체제에 길들여져 왔는데 하루아침에 자본주의로 간다는데 길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모든 게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요. 그때 혼란을 겪은 이들은 한둘이 아녜요. 자살한 이들도 많았고, 꿈도 없어졌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길이 사라지니까 모든 꿈을 로봇에 얹고 밀고 나간 거지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타지키스탄 두샨베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카자흐스탄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해 모스크바에서 살아온 박미하일. 연해주에 정착한 고조부에서부터 시작된 긴 유랑의 삶을 이어온 그가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서 있다. [박미하일 제공]


안드레이는 '기술자이자 물리학자'이며 그림도 그리고 요리도 제법 하는 서른 살 남자. 그는 음악회에서 만나 사귄 여자 친구 타냐를 모델로 로봇을 만든다. 로봇 만드는 일은 어린시절부터 꾸었던 꿈이다. 그는 "결단코 마조히스트도 망상증 환자도 아니며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인형을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면서 "어린 시절의 영혼이 내 안에서 깨어난 것, 어른이었다가 돌연 다시 아이가 돼버린 것"이라고 기술한다. 그는 "마치 방랑에 대한 갈증이, 누렇게 변색한 낡은 지도 한 장만 손에 쥐고 있는 뱃사람을 끌어당기듯, 아스라이 먼 푸르른 미지의 어느 곳이 나를 끌어당겼다"면서 "몽상가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12월 중순쯤에 피부 만드는 작업이 완료되어 샘플 몇 개를 만들었다. 나는 생체블록을 컴퓨터에 연결해서 최종 샘플을 도출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설정했다. 다섯 번의 시도 가운데 나는 KTN-20, 즉 '신비롭고 낯선 20세 여자의 피부'로 이름 붙인 것을 선택했다.'

안드레이도 여자 피부로 만든 로봇이 감쪽같이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고하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날 집을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로봇 '예올리'는 소파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가, 자신이 그의 아내라고 선언한다. 심지어 자신의 성장 이력, 개인의 역사까지 소상하게 전해준다. 여자친구 타냐의 모친을 치료하기 위해 치료사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 여인이 오래 전 뉴욕에서 동양 의술을 배우고 유럽여행을 왔다가 스탈린에게 체포돼 오랜 유형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접한다. 예올리는 그 여인의 손녀라고 주장하거니와, 살펴본 즉 그 여인의 며느리는 딸을 낳고 싶었지만 희망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올리'는 러시아에서 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이들의 '희망'이었던 셈이다.

'잘 익은 사과냄새가 나는 그녀의 입술과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가까이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지고는 한다. 왠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예올리가 내 가슴에 머리를 갖다 댈 때마다 붕 뜨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축을 따라 맹렬히 돌아가던 우주 공간이 미지의 곳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자신이 직접 그린 '예올리' 앞에 선 박미하일. 그는 "독자 여러분께서 여주인공인 예올리와 대화를 나누고, 연약하면서도 마음 따뜻하고 진실한, 즉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녀에게 빠져들었으면 한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예올리는 봄날 같이 따스한 눈빛을 지닌 순정한 여자 사람으로 다가왔다. 안드레이는 여자 친구 타냐를 닮은 이 로봇에게 점점 마음을 깊이 주고 책임감을 느낀다.

 

'때때로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해 한밤중에 잠에서 깨고는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어두컴컴한 천장에 시선을 둔 채 잠든 예올리의 고르고 나지막한 숨소리를 들으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낮이라고 하는 현실과, 밤이라고 하는 난해함, 이런 2차원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밤은 북새통 같은 시간으로 가득했던 하루를 삼켜버리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강 하나만 남겨놓는다. 그렇게 사람은 죽을 때까지 현실과 난해함을 번갈아 넘나들며 사는 것이다.'

 

자본주의 물결이 해일처럼 덮쳐오면서 좌표를 잃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폭력과 납치를 포함한 부정한 행위들을 남발한다. 이 와중에 '예올리'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안 이들이 그녀를 납치해 흑해 아래 좌초된 보물을 건져 올릴 계획을 세운다. 사라진 예올리를 찾아 안드레이의 추적과 방황이 이어진다. 크림반도의 심페로폴과 항구 페오도시야, 옛 소련 시절에 많은 이들이 휴가를 보내던 흑해의 콕테벨 등이 무대로 등장하면서 국내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인사동 전시장에서 만난 미하일에게 아무리 훌륭해도 로봇은 인간이 아닌데, 정작 사람인 타냐를 방기한 채 로봇에게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이 어려운 세상에 로봇을 혼자 보내면 어떻게 살까 싶었다"면서 "어떤 판타지는 사실보다 더 사실"이라고 말했다. 처음 인간을 만든 창조주도 저 연민을 느낀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안드레이는 예올리와 함께 한국의 남해로 거처를 옮겨 꿈을 이어간다.

▲박미하일(왼쪽)이 서울 인사동 전시장에서 고려인 아내 장발렌티나의 연주를 지켜보고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예올리는 망망대해 같은 미지의 삶에 마치 파편처럼 던져집니다. 그녀는 온통 불의의 사건들로 가득한 세상을 이겨내야 하는 절박함과 숱한 비밀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안드레이는 부서질 것만 같은 이 창조물을 적대적인 세상으로부터 지켜야만 했습니다. 나는 우리 주변의 삶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즉, 예올리의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기 위해서 작품에 환상적인 요소를 도입했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곳에서 진행됩니다. 현재와 과거가 구별되지 않고, 꿈과 현실이 분리되지 않고, 환상이 실제와 엮여 있는 그런 곳에서."

 

1990년대 초 중앙아시아를 방문한 소설가 윤후명을 안내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이래, 국내에서 10여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소설을 통해 국내 독자들과 만나온 박미하일은 러시아에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일도 꾸준히 이어왔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2004)과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2011)을 번역했고, 박경리의 '토지' 1권(2006)에 이어 올 봄에는 '토지' 2권 번역도 마무리했다. 한국에 들어와 파주에서 5년째 살아온 미하일은 11월에는 '예올리'의 주인공처럼 남해로 내려가 친구가 빌려준 펜션에서 그림과 소설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저작권자ⓒ U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핫이슈

만평

2020.10.25 0시 기준
25837
457
23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