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비명과 통곡의 시절에 바치는 한 편의 시詩"

조용호 / 기사승인 : 2021-04-30 18:38:46
  • -
  • +
  • 인쇄
구병모 새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
유한한 생명들의 숙명을 애도하며
찰나의 의미를 찾는 환상 서사
"삶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 시절"

"신화와 전설에서는 무한의 존재들이 신적이고 영웅적인 모습으로 많이 나타났습니다. 민담에서는 영원성과 관련 있는 존재들이 주로 요정, 마법사 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것은 왠지 웅장하고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이미지로 제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신도 영웅도 아닌 소박한 존재들에 불과합니다."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스러지는 죽음이라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 그 숙명을 지켜보는 불멸의 존재에게 인간은 어떻게 보일까. 그 불멸하는 존재가 인간을 바라보는 마음도 과연 사람이 하루살이나 매미를 보는 쓸쓸함과 닮아 있을까.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 존재가 죽음을 숙명으로 거느리는 존재의 마음을 기실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기약 없는 불멸의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언젠가는 끝이 있는 존재가 있다면, 유한에 대한 슬픔은 훨씬 더 인간에 가깝게 공감하지 않을까. 구병모의 새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현대문학)는 불멸과 유한 사이를 부유하는 존재가 모든 생명의 숙명을 애도하며 '영원한 찰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서사다.

▲시적인 문체로 환상적인 존재를 등장시켜 생명의 숙명을 애도한 소설가 구병모. 그는 "인간은 틀려먹었고 문명과 이성과 감성은 끝장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이 같은 소설을 쓰게 만든 계기 중 하나"라고 말한다. [구병모 제공]


 
"그런데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신도 영웅도 아닌 소박한 존재들에 불과합니다. 먼 옛날의 사람들이 믿었던 존재들, 자연과 사물에 깃들어 있던 영혼들이 어쩌다 신의 실수 또는 변덕으로 사람과 같은 위치에 놓이고 사람의 형상을 입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기존에 그 영혼들이 지닌 일종의 권능이라고 할 수 있었던 절대적인 영원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완전한 무한을 보장받지는 못한 상태에서 그렇다고 완전한 유한도 아닌 상태를 계속 겪어나가며 인간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고통과 슬픔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에 깃든 존재들이 있었다. '안'은 '창문만 열어도 빗방울에 걸터앉거나 빛줄기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그들을 기름등잔을 쓰던 옛날에는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한때 그들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때 그의 이름은 '얀'이었다. 얀은 구두를 짓는 정령이었다. 얀과 그의 형제들은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의 작업장에서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묘한 움직임으로 멋진 구두를 우렁각시처럼 지어놓곤 했다. 구두장이부부가 고마워서 이 존재들을 배려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점차 다른 존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늙지 않고 병들지 않으며 때론 필요에 따라 꾸준한 명상과 집중 끝에 자신들이 원하는 형상으로 얼굴을 바꿀 수도 있는 체질임을' 알게 되지만 '이 같은 자연의 실수가 유구히 지속될 것인지, 언제까지 보장될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른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식을 모르는데 '미아'가 어느날 '안' 앞에 나타난다. '미아'는 인간들이 늙어서 죽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도 쉼 없이 사랑을 한다. 안은 그런 이별이 싫었다. 그는 '한동안의 정박 이상으로 일생의 정주를 꿈꾸지 않으며 일생이라는 의미도 체감하지 못하니, 타인과 함께 늙어가지 않는다는 문제에 대해 너무 깊이 염려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것을, 사람의 삶은 신이 머금은 한 번의 거대한 냉소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안'이라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무한의 시간 가운데 한 개의 점에 불과한 날들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낀 상대'가 없을 리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하룻밤, 길어야 반년을 넘기지 않는 관계를 맺고 끊기를 거듭'했다. 안은 '사람과의 인연 같은 건 힘주어 잡아당기면 찢어지는 곤충의 투명한 날개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난 것은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과 같았다. 흩어져 긴 세월을 살면서도 안의 심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형제가 '미아'였다. 그에게 '미아'가 어느날 발레리노 애인 '유진'의 구두를 지어달라고 찾아왔다. 

 

안에게 구두 제작을 배우는 수강생 중 시인이 있었고, 그 시인의 노모가 그를 찾아온다. 안이 젊은 시절 애도를 피하기 위해 먼저 떠났던 여인이었다. 늙은 그 여자는 안을 몰라보지만, 안은 그 인연을 한눈에 알아본다. '노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여인을 본 뒤 안은 오래전 그녀를 보낸 자신의 선택이 더욱 옳았다고 여긴다. 점유할 수도 당겨 쓸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인간과 인연을 맺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고.'

 안이 미아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유진에게 알려주었느냐고 묻자, 미아는 '언젠가 나는 혼자 남을 것이고 네가 가는 길을 배웅하게 될 거라고, 남아 있는 동안 어쩌면 영원히 배웅과 애도의 상태로 살 거라고' 분명히 말했지만, 유진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웃을 뿐이었다고 전한다. 안은 도저한 비관주의자다. 그에게는 정령들이 눈에 보이던 그 옛날과 달리 작금의 세상은 '비명과 통곡과 죽음의 시절, 인간과 괴물이 앉은 자리를 바꾸고 정령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존재들은 기거할 터를 잃은 지 오래이며 삶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 정도를 넘어 삶 자체가 죽음의 수많은 양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시절이다. '비명과 통곡'을 극복할, 정령들이 존재할 터전을 회복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저는 사실은 회복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고 문명이 있는 이상, 그 터전의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쪽에 가깝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인 위기 상황 때문에만 그런 게 아니라, 그전부터 인식이 그랬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두 인물이 정령의 움직임들을 목격하여 언뜻 훈훈한 마무리가 지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제외한 다른 보통의 사람들은 그 존재들을 볼 수 없는 것으로 나옵니다. 인간은 틀려먹었고 문명과 이성과 감성은 끝장난 게 아닐까, 라는 평소의 회의가 이 같은 소설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합니다."

 

문자로 던진 질문에 문자로 돌아온 '인간은 틀려먹었다'는 작가의 응답은 서늘하다. 창비청소년문학상(2008년)에 '위키드 베이커리'가 당선돼 문단에 나온 이래, 구병모는 '아가미' '파과' '한 스푼의 시간' 같은 환상과 신비와 공포가 어우러지는 작품들을 생산해왔다. 이번 소설도 환상이라는 도구를 동원한 점에서는 그 연장선상에 있지만 인간의 숙명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새롭다. 구병모는 "처음부터 환상을 용의주도한 서사적 전략으로 써온 게 아니라 그냥 일상의 일부로 간주하고 썼다"면서 "환상이나 비현실적인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 어떤 특별한 작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안이 미아에게 애인이 늙어서 스러진 뒤를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자, 미아는 답한다.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발레리노 유진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순간들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정령들의 도움으로 완성되는, 지금 이 순간이 '불멸하는 찰나'로 거듭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유진의 손짓이 머무는 곳에, 발끝이 닿은 자리에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는 작은 존재들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로 보이지 않는 걸까. 하나, 둘, 셋… 마지막으로 목격한 지 오래되어 확신할 수 없으나 분명 인간의 지식으로 판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음악에 몸을 맡기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무대를 서성이고 있다. 그 존재들은 처음에는 어떤 회의도 불신도 반감도 갖지 않은 빛으로만 감지되었다가 파장의 움직임이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소리와 냄새로도 느껴지고, 어느 때는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이었다가 타오르는 횃불이었다가 녹아내리는 눈송이였다가 하면서 속성을 자유로이 바꾸더니 다음 순간 리듬과 박자를 갖춘 음악이었다가 마침내는 영원히 낭독이 불가능한 언어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처럼 보인다.'

▲환상적인 요소를 소설에 즐겨 써 온 구병모는 "환상을 용의주도한 서사적 전략으로 써온 게 아니라 그냥 일상의 일부로 간주하고 썼다"고 말한다. [구병모 제공]

 

'영원히 낭독이 불가능한 언어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는 천지에 미만한 정령들의 춤이기도 하다. 그 존재를 느끼고 볼 수 없는 인간들에게 유한한 세상은 무한한 공허와 고독으로 가득할 뿐이다. 구병모는 '안'으로 하여금 '언젠가는 망각과 기억 사이에 난 미로 같은 길들을 따라 육신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하는 일이, 자신의 몫인 것만 같다'고 결국 수긍하게 만든다. '어떤 것을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일은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굳이 쓰는가, 끝장난 것 같고 희망이나 회복은 어렵다면서 왜 이걸 계속하고 있는가. 그냥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서 쓰는 건가… 그걸 모르겠어서, 그걸 계속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 사정이고, 읽으시는 분들께 저의 허무와 전망 없음과 불가지(不可知)의 감정을 전염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 가능한 한 아름다운 장면들과 맥락들을 담아보려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소설을 보면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테고, 한편으론 소설 속에서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어떤 것을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일은 별개니까요."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upinews.kr

[저작권자ⓒ U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핫이슈

2021. 5. 6. 0시 기준
125519
1851
115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