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 "그리운 것들은 모두 세상 저편에 있다"

조용호 / 기사승인 : 2021-10-20 17: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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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슬 시인 두번째 시집 '0도의 사랑'
유년의 순수한 '0도의 세계'에 대한 탐색
삶과 언어를 벗겨내 궁극의 그리움 완성
루마니아 남서부 도시 크라이오바에서 국제 시축제가 열렸다. 그 행사에 초대받아 갔던 김구슬 시인은 소년원에서 열린 시낭송회에 참여한 뒤 새삼스럽게 시의 힘을 절감했다. 시인들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청소년들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하고 어두웠는데, 소년들이 퇴장할 때는 밝은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정작 남은 시인들이 수감자가 되는 심정이었다고, 김 시인은 최근 펴낸 두 번째 시집 '0도의 사랑'(서정시학)에 썼다.

▲5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펴낸 김구슬 시인. 유년의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이번 시집의 동력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시인들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청소년들의 시선은 멀고 낯설다/ 수감 순서를 기다리듯/ 잠시 후 어색한 몸짓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우리는/ 또 다른 죄수가 된다// 우리 모두 자아의 감옥 속에 있다는/ 시인의 고백에/ 불안하고 어두운 눈빛이 환해진다/ 시는 길 잃은 마음을 밝히는/ 반짝이는 별빛이라는/ 또 다른 고백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그들이 밝은 미소로 손을 흔들며 퇴장하자/ 수감자로 남은 우리는/ 혼돈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헝클어진 땅거미를 헤쳐 나간다// 시는 작지만 그 힘은 크다/ 돌덩이같이 차갑고 무거운 얼굴에/ 따스한 공감의 미소를/ 꽃피게 하니,/ 길 잃은 길을 찾아가게 하니('크라이오바 소년원 시 낭송회')


"그 소년원에 갔을 때 처음에는 범죄를 저질러 수감된 소년들의 얼굴이 한결같이 죽은 사람들 얼굴처럼 어둡고 표정이 없었어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고통이 느껴지더군요. 시를 읽어주는 과정에서 점차 표정이 변하는 걸 느꼈어요. 굉장히 좋아하면서 나중에는 박수까지 치더군요. 시라는 게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이렇게 인간을 위로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발휘합니다. 시의 힘이 위대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김 시인이 펴낸 두 번째 시집은 이러한 시의 본질을 성찰하면서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닿을 수 없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원형의 시공을 그리워하는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표제시 '0도의 사랑'은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그런 원형에 대한 그리움을 함축한 시편이다. 김 시인은 "0도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세계"라고 상정한다. 0도는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하고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의 근원 같은 것"으로 "그 근원은 유년이라는 원형에 닿아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무언가를 의식하면서 언어를 사용하고 주체와 개체의 거리를 두게 되기 이전의 어떤 순간들, 그 유년의 시점을 시인은 '0도'라고 전제한 것이다.  

0도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세계이다// 그림자 없는 오솔길을 걸으며/ 우리는 가끔 허공을 응시한다/ 머리 위에는 소리 없는 깃털들이/ 출구 없는 소실점을 향하고/ 발밑을 내려다보며 걷던/ 가슴이 문득 울고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읽을 수 없어서 일 것이다/ 꽃 한 송이 지지 않는 세계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리운 것들은/ 모두 세상 저편에 있다// 시커먼 파도를 타고/ 출항을 예고하는 뱃고동 소리가/ 사라지는 수평선에 파랑을 일으키며/ 이 세상에 없는 사랑을 손짓한다('0도의 사랑')

 


"저를 부르는 어떤 소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해요. 정말 힘들거나 외로울 때, 인간이라면 다 그런 순간들이 있을 텐데 저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이것이 뭘까 항상 생각하는데 철학자 하이데거도 숲속 산장에서 시원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쪽으로 오라고, 그리운 것들은 다 저 너머의 세상에 있다고 속삭이는… 유년의 행복한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그런 것들이 그리움의 뿌리인 거죠."

김 시인은 "만남이란/ 헤어진 후/ 마음에 격랑이 이는 것이다/ 격랑의 의미를 헤아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미묘한 정체를 헤아리고 나니 격랑이 고요가 되었다/ 망각 속에서 또 다시 격랑이 일곤 한다"('만남')고 썼는데, 그 만남의 그리운 대상은 타인이 아닌 과거 어느 시점의 자신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대'라는 이름의 '나'를 탐구하는 이 시편은 어떠한가.

그대를 말한다는 것은/ 나를 멀리서 바라보고/ 나에 저항하여/ 새로운 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나였던 것과 거리를 갖고/ 나였던 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 순간/ 나였던 내가 나를 힘껏 움켜쥔다// 과거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로부터 벗어나려는 순간/ 과거의 내가 나를 다시 소환하고/ 나는 다시 내가 된다// 그대를 말한다는 것은/ 나였던 죽음을 죽기 위함이다('그대를 말한다는 것')

사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변형된 자기애일 수 있다. 이 나르시시즘은 상대에게 투사된 자신을 향한 사랑인 셈이다. 자신과 객관적인 거리를 두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 사랑의 핵심을 명징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나로부터 벗어나려는 순간/ 과거의 내가 나를 다시 소환하고/ 나는 다시 내가 된다"는 도돌이표에 갇히게 된다. 김 시인은 "결국 진정한 나의 모습 또는 어떤 존재의 본질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겉껍데기를 밀어내야 한다"면서 "시를 쓸 때도 언어의 겉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구슬 시인은 "인생은, 온몸으로 나를 응시하는 일"이라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다시는 가 닿을 수 없는 '0도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시인은 "끝없이 벗겨내는 작업을 하다 보면 본질에 내려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그동안 살면서 쌓아온 것들이 무의미한 게 아니라,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본질적인 '0도'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구슬 시인에게 "인생은,/ 또 다른 나를/ 가슴에 꼭 안고/ 처음 세상을 바라보았던 그때처럼/ 온몸으로 나를 응시하는 일"이다. 

사랑은/ 사라져가는 리듬 속에 있다// 사랑은/ 삐걱거리는 세월의 계단을 올라/ 어둠 속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그림자를/ 한없이 불러보는 것이다// 사랑은 저편에서 손짓하는/ 그대를 기억하는 것이다// 달리는 채울 수 없는 침묵의 행간에 사로잡혀/ 의혹 속에 사라진 시간을 되찾으려 애쓰며/ 아픔을 통해서만 기억되는 그대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허공에/ 남겨진 희미한 흔적을 황홀해하며/ 마침내 그대를 향한 시선을 멈추는 것이다('사라져가는 리듬')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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