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독도를 수호하고, 대마도를 되찾는 것이 호국강령"

조용호 / 기사승인 : 2021-10-22 1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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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1천행 대하서사시 '동해' 펴낸 공광규 시인
울릉도 초대 군수 배계주의 생애를 축으로
일본의 독도 탐식 과정과 배경 생생하게 담아
"민족과 국가는 여전히 중요하고 유효한 가치"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반포한 지 백년이 지났고, 다시 21년이 흘렀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은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바꾸고 강원도의 27번째 군으로 승격시켰다. 울릉도의 지방관 배계주를 초대 군수로 임명했고, 석도(石島)를 포함한 주변 섬들을 부속도서로 확인하여 알렸다. 백년 뒤 후손들은 이 날을 '독도의 날'로 기리고 있다. 올해도 그 날은 다시 왔지만,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는 일본의 억지는 여전하다. 아예 교과서에 명토를 박아 자라나는 세대까지 세뇌시키는 행태로 나아가고 있다.

▲민족서사시 3부작의 두번째 결실로 대하서사시 '동해'를 펴낸 공광규 시인.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공광규 시인이 울릉도 초대 군수 배계주(1850~1918)의 생애를 축으로, 한말의 복잡한 정세와 함께 일본의 영토 침탈 야욕을 그린 대하 서사시 '동해'(천년의시작)를 펴냈다. 1만1천 행에 이르는 이 서사시는 여러 자료와 고지도를 동원해 일본 막부들도 인정했던 우리 영토를 새삼 확인하면서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를 기점으로 어떻게 독도를 막무가내로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는지 드러낸다. 대부분 포기하거나 일본 쪽에 붙어 안일을 도모하던 시점에도 배계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불법 벌목한 사실을 두고 일본에 들어가 재판을 통해 끝까지 겨루어 승소를 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고, 일본 시찰단이 울릉도에 들어와 권력을 행사할 무렵에도 홀로 저항했지만 나라가 없어지는 판국에 그의 항거는 무력했다. 계주가 울릉도를 떠나던 날인 1907년 8월 1일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는 서해 소야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계주가 감은 눈을 더 이상 뜨지 않자/ 검푸른 숲과 느티나무 빈 가지가/ 사흘 밤낮을 우우 울었다// 겨우내 내린 눈이 쌓인 소야도 골짜기/ 바다를 건너오는 겨울바람은 조선의 운명처럼/ 조선 민중의 가난처럼 매서웠다'

ㅡ울릉도 초대 군수 배계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대하 서사시의 중심에 세우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우연히 행사장에서 유족을 만난 이후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8월에 왜놈들이 울릉도를 점거하자 도감 배계주가 왜국으로 가서 담판을 지었다'는 구절을 접하고 본격적으로 파고 들었다. 배계주는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암담한 데도 쉽게 훼절하지 않고 국가라든가 민족의 가치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한 인물이다. 배계주의 생애에 대한 연구가 단편적으로 존재할 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한말 망국의 이야기를 구성하려다 보니 이 인물을 중심으로 쓰면 좋겠다 싶었다. 이 인물의 생애가 시간의 축이지만 당시의 정세와 다른 인물들을 함께 등장시켰다."

ㅡ주어진 임무에 충실했을 뿐인데도 배계주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에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사실은 더 많았다. 관리들이나 기득권을 지닌 지식인들은 거의 그러지 않았다. 일본의 침탈이 심각해지니까 울릉도를 격상시켜서 군으로 만들고, 도감으로 지내면서 일본에까지 건너가 울릉도의 권리를 지킨 그를 군수로 임명한 것이다. 중과부적이거나 아무리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안 되는 상황에서는 훼절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사람은 끝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울릉도 초대 군수 배계주(왼쪽, 배계주기념사업회 제공)와 고종이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한 칙령 제41호(서울대 규장각 제공).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됐음을 통보하러 온 일본 시찰단을 맞은 후임 군수 심흥택의 행태는 이러하다. '일본 장사꾼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조선인들 등골을 빼먹는 사상의소장(士商義所長) 김광호라는 자가 회답시 한 수를 읊었다/ (…)/일본 시찰단이 기뻐서 날뛰자/ 군수 심흥택도 시를 한 수 내놓았다/ 시 제목은 시찰단 대표 '진자이 사무관에게 드림'/ (…)/ 대한제국 군수라는 자가/ 대한제국 영토를 침탈하고 알리러 온/ 일본 관리를 어여쁘다 하고 만나서 기쁘다니// 영토를 불법 탈취한 일본 관리들과/ 울릉도를 같이 유람하고/ 군수와 함께 송별 시를 주고받는 자리가 무르익었다.' 이미 일본의 부산영사관은 1902년 3월부터 무장 경관 3명을 울릉도에 주재시켜 모든 지역을 마음대로 활보하는 상황이었다. 격분한 계주는 "석도를 일본에 편입하고/ 시찰을 왔다니 무슨 짓들이냐?/ 황제 칙령으로 군수였던 내가 관리하던 섬이다"면서 "일본 막부와 행정기관이/ 울릉도와 석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 문서들이/ 많이 쌓여 있다"고 홀로 맞섰다.

ㅡ일본은 식민제국주의가 퇴색한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이웃 나라의 영토에 대해 억지 주장을 계속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제물포조약을 맺은 이래 일본이 우리 영토의 섬을 자꾸 건드리고 침략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독도는 특히 일본과 가까워 해산물 임산물을 불법 채취해서 도민들이 살기 힘들어지자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군수에게 관리를 맡긴 것이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는 없다. 러일전쟁을 벌이면서 독도의 군사적 중요성을 발견했고, 어부들과 상인들의 이해가 군과 일치하면서 시마네현 부속도서로 일방적으로 편입하고 우리에겐 통보도 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일본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했다. 고지도 자료나 일본 막부들이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인정한 문서들이 많다. 이번 서사시에 일본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 옛 지도와 자료들을 많이 인용해놓았지만,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만 관심이 비등하고 연구자들이 적은 것도 문제다."

ㅡ이웃과 원수로 살면 서로 손해이니 한일 관계가 원수로 치닫지 않기를 바란다고 서문에 썼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질 뚜렷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게 그 해법인데, 문제는 정치가 이 상황을 이용한다는 데 있다. 국내 정치가 어려울 때는 항상 영토 문제 같은 걸 이용해 관심을 돌리는 식이다.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역사 교육이 긴요하다. 일본 사람들도 전부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건 아니다. 사실은 밖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국경 문제를 둘러싼 분쟁은 어디나 비슷하다. 그 문제를 크게 확대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문제를 확대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지만 일본은 교과서에까지 억지 주장을 담아 교육을 시키는 상황이다. 공광규는 "일본이 도발할 때만 대응하지 말고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하고 제대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이런 점이 많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아쉬움이 대하서사시 '동해' 집필의 동인이 되었을 터이다. 문학적으로 다양한 자료를 녹여 묘파한 이 서사시가 교육용으로도 충분히 힘을 지닐 법하다. 독도를 '동해대신 설화'로 새롭게 창조해낸 서사의 한 대목은 웅혼하다.

"멀고 멀고 먼 옛날/ 망망대해를 휘젓고 다니는 동해대신이 있어/ 바람과 파도를 끌고 다녔다// 파랑을 지느러미로 달고 다니는/ 대신의 머리에 두 바위 뿔이 있는데/ 높이가 오 리나 되었다// 세상은 암흑이었는데/ 어느 날 동해대신이 머리를 치켜들자/ 우주에 금이 가 땅과 물과 하늘로 나뉘었다// 금이 간 틈에서 태양이 솟아올라/ 두 뿔 사이로 햇살이 내려와/ 바다가 반짝였는데// 사람들은 두 뿔을/ 동쪽 섬과/ 서쪽 섬으로 불렀다// (…)//두 개 바위 위로 해가 뜨는/ 죽변에서 3백 리 울릉도에서 2백 리/ 연중 8할이 흐리거나 눈비가 내리는// 강치가 바위에 올라앉아 컹컹 노래하는/ 개밀과 큰이삭풀과/ 바랭이와 돌피가 자라는 독섬"

자료가 많지 않은 배계주를 붙들고 긴 서사를 만들어낸 경우는 처음이다. 그만큼 공백을 다른 인물과 함께 당시 정세로 채워 넣었다. 서해 소야도에서 태어나 남해를 거쳐 울릉도까지 간 계주에게 섬의 역사를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하는 가상의 인물 '평해 노인'이 대표적이다. 동학도 출신인 이 노인은 울릉도와 독도, 대마도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지혜로운 인물이다. 이와 함께 구전동요, 어부가, 시조, 한시, 자유시, 가사 형식의 다양한 시 장르를 넘나들며 한 연을 3행으로 구성해 가독성 높게 끌고 나간다. '금강산'에 이어 시인과 출판사가 공동 기획한 '민족서사시 3부작'의 두 번째 결과물이다. 분단된 나라의 영토에서 출발해 바다로 나아갔고, 다시 대륙으로까지 심리적 영토를 넓히는 기획이다.

▲공광규는 '금강산' '동해'에 이어 대륙으로 심리적 영토를 넓히는 작품을 다시 집필할 예정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공광규는 "민족주의자를 위험하게 여기면서 민족이나 국가의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이지 않으면 민족이나 국가가 서로 화합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충분히 경험했듯이 어려움이 닥치면 생산 계층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다"면서 "민족과 국가라든가 애국이라는 가치는 여전히 중요하고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식민제국주의 시절에 강제로 침탈한 독도를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리 욕심을 내는 경우라면, 대마도야말로 역사적으로 우리 땅임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공광규는 '평해 노인'의 입을 빌려 "대마도를 되찾는 것이 호국강령"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노인은 대마도가/ 삼한 시절 마한 이래로 신라 고려 조선이 통치한/ 조선의 속도였다고 했다// 참나무와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다는 섬/ 웅본과 웅습과 웅본신사 등 이런 마한 풍습과 고조선 가림토 문자가 전한다고 했다//(...)//대마도에는 왜인이 살지 않았으며/ 조선 도래인의 텃밭이자 일본이 그린 '팔도 총도'에/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다고 했다// 다대포에서 물빛이 아름다운 대마도까지 120리/ 대마도에서 일본 박다항까지가 350리/ 거리상으로도 마땅히 대한제국의 섬// 의병장 최익현이 끌려가 순절하고/ 의병장 임병찬이 감금되어 대마일기를 쓰고/ 의병장 유준근이 억류되었던 비극의 섬// 노인은 대한제국이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독도를 수호하고/ 대마도를 되찾는 것이 호국강령이라고 했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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